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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보크지 : 정보글) ‘서울대생’이 선임병을 총으로 사살하다 - 최영오 일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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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의 배경

1962년 7월 8일, 한국 군부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다.



사건 당사자인 최영오일병은 가난한 가정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대 천문기상학과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20년 동안 거리에서 행상하며 아들을 뒷바라지 했다. 최 일병은 집안의 희망이었고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그는 4학년 재학 중에 대한민국 육군 단기 학보병 신분으로 입대하였다.

*단기 학보병 : 대학 재학 중 입대한 병사를 1년 6개월 만에 제대시키는 제도. 지금은 없어짐.



최영오 일병에게는 입대 전부터 사귄 애인이 있었고, 군입대 후에도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2. 사건의 전개

사건의 발단은 정 병장과 고 상병이 최 일병의 편지를 몰래 뜯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서울로부터 여자의 편지가 빈번히 날아들자 같은 중대에서 근무하던 정 병장과 고 상병이 몰래 편지를 뜯어봤는데 그 편지 수가 무려 12통에 이른다.



최 일병은 부끄러우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선임병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중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최 일병을 놀리고 희롱했다.



최 일병은 선임병들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선임병들은 오히려 건방지다며 최 일병을 구타했다.

참고로 정 병장과 고 상병은 둘 다 최종학력이 중졸이었으며, 학력 덕분에 자신들보다 늦게 입대한 주제에 일찍 제대하는 최영오 일병의 존재 자체가 괘씸했고, 그래서 주먹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그들간의 감정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결국 1962년 7월 8일 낮 12시 35분 사건이 벌어졌다.



그 날은 위문공연 관람을 위해 연병장에 전 장병이 집합한 날이었다. 정 병장과 고 상병은 내무반 앞 국기게양대에 연병장 쪽의 무대를 향해 나란히 서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최 일병은 내무반에 뛰어 들어가 M1소총에 실탄을 장전했다. 그리고 연병장으로 나와 정 병장에게 4발, 고 상병에게 3발을 발사했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최 일병은 ‘상관살해죄’로 체포돼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3. 최 일병의 처형

최영오 일병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그는 법정에서 ‘정 병장과 고 상병이 12번이나 애인한테 온 편지를 뜯어보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적인 말로 희롱했다“며 ”그들이 편지를 뜯어본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추잡스러운 말로 놀려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최 일병은 대법원에 항고했으나 대법원은 기각해 사형이 확정됐다.







최 일병이 최고 명문대인 서울대 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이 사건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대대적인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학교 동기들과 동문들은 물론 각계각층에서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탄원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상관살해죄’는 당시 법정형이 사형밖에 없었다. 따라서 탄원서를 돌려도 사형판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최 일병은 1963년 3월 19일 급하게 총살되었다. 심지어 처형 3시간 전에 최 일병의 형인 최영수 씨가 최 일병은 면회했는데 “다음 면회 때는 어머니와 조카를 데려와달라”라고 부탁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최 일병 자신도 3시간 뒤에 처형되는 건 몰랐던 걸로 보인다.



최 일병의 처형 직전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홀로 계시는 어머님의 건강과 남은 가족들의 건강을 빌 뿐입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제가 죽음으로써 우리나라 군대가 관료주의적인 것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민주적인 군대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저의 구명을 위해 애써 주신 여러 선생님과 친우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4. 그 뒤 이야기

사형이 집행되고 사체인수확인서를 수령한 최 일병의 모친도 그날 밤 마포종점 근처의 한강둑에 올라가 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최 일병의 어머니는 아들의 사형이 확정된 후 “내 목숨과 바꿀 자식”이라며 가슴 아파했고, “그놈이 오직 나의 낙이었으며 영오가 죽는다며 나도 따라가겠다”는 말을 했다.



결국 최 일병의 어머니도 한강에 투신 자살했고 두 모자는 함께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이 사건 이후 단기 학보병 제도가 폐지되었다.





(피살된 정 병장과 고 상병은 국립묘지에 묻혔고 1계급 특진을 받았다. 최영오 일병의 집안은 1987년 8월까지 용공분자 집안으로 낙인찍힘으로 사회로부터 격리 조치되었다.)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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